2024 18주차 회고 | 5년 연애의 끝
요즘 날이 참 좋다. 이번주 내내 쨍쨍해서 나를 포함한 모두가 들뜬 모습이었는데, 다음주부턴 기여코 다시 날이 흐려진다고 한다. 다행히(?) 아직 학교 수업은 지금까지 처럼 열과 성을 다하는 공부량을 요구하진 않아서, 쉬엄쉬엄 필요한 공부를 하고 레포트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날도 도서관에 있다가 날씨가 참 좋아서, 도서관 건물 밖에서 햇빛을 만끽하며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자리로 들어가는데 학생 조교로 일하는 친구와 딱 마주쳤다. 화장기 없는 밋밋한 얼굴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그 친구가 “여긴 내 남자친구야” 하며 소개를 시켜주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애써 모른체 하고 지냈던 나의 희망사항이 떠올라 마음이 헛헛했다. 내가 그토록 바랐던 일은, 어떻게 보면 참 사소하게도, 남자친구와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저녁 늦은 시간 혼자 무섭게 길을 걷지 않아도 되는 것.
이른 저녁 쯤 집에 와서 이제는 전 남자친구가 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우리 이제 언제 얼굴 볼 수 있냐고 물었다.
“나도 답답해”
“독일에 올 수 있기는 한거야?”
“모르겠어”
그가 어떤 노력을 쏟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푸라기 같은 가능성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건데기가 있는지 보고싶었다. 하지만 모르겠다는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 같았고 이에 나는 지난 4년동안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말을 뱉어버렸다.
“너.. 아무래도 못올 것 같아.”
그러니 대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우리의 질긴 인연도 그렇게 갑작스런 전화 한통에 끝이 났다.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며 담배를 연신 피우는 그에게 우리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니,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야하지 않겠냐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몇달 전부터 우리 관계에 끝이 있음을 알았음에도 이별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아무런 문제상황 없이도 이별은 그저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뱉은 말이면서 나는 눈물이 마구 터져나와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그리 엉엉 우는 나에게 그는 “어른이니까 울지 말아라”, “한달만 지나면 아무렇지 않을거다”, “학교 공부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제 모닝콜 안할테니 알람 잘 맞춰놓고 자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던가,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저릿한지. 나에겐 더이상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뿌듯해하면서, 이런 사람이면 결혼을 해서라도 비자를 주어서 그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어떤 모습인지를 가르쳐준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별 극복하기 따위의 키워드로 검색해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어떤 영상에서 말하는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사람에겐 정해진 인연의 양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그 양을 모두 써버린 것 뿐이라는 말…
그 날은 밤까지 내내 울다가 다음날 출근해서 굳이 야근을 했다.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을 피하고 싶어서 굳이 할일을 찾아가면서 사무실에 밤까지 남아있다, 10시가 넘어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나름 친하게 지내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하루종일 답장을 안해서 걱정돼서 전화했단다. 결혼식에 참석하러 이탈리아에 가있는데 호텔에 돌아가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내가 마음에 걸렸었나보다. 버스에서 전화를 하니 내 이야기에 모두가 귀를 쫑긋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집에서 가까운 몇 정류장 전에서 내려서, 상쾌한 밤공기를 마시며 그녀에게 연신 괜찮다는 말을 했다.
사실 생각보다 괜찮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 날 점심에는 내가 일하는 회사 옆 건물에서 일하는 학교 친구와 점심에 만나서 커피 한잔을 했다. 그간 몇번이나 그 친구와 밥을 먹기로 하고도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약속을 깼어야 했는데 이번엔 시간 맞춰 친구를 볼 수 있었다. 경쟁심과 질투심에 불타오르던 나에게 아무런 경계 없이 여러가지 유용한 정보들을 공유해주고,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느라 시간 없지 않느냐며 시험 전날 본인이 정리한 노트까지 공유해주며 학기 초 내가 가졌던 경계심도 스르르 녹아내리게 만든 친구.
내가 최근 힘든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자 그는 카페에서 갑작스레 손에 있던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핑크색 깃털이 붙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 날 아침 우연히 길에서 발견한 깃털인데 핫핑크 빛을 띄는 것이 기분 좋은 느낌이라 본인이 간직하려다 응원의 마음을 담아 나에게 주고싶었단다.
그런 순수한 응원은 나이가 들수록 불가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손으로 눌러쓴 편지와 테이프로 엉성하게 붙여놓은 깃털이 그의 진심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별이야 뭐, 그냥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쿨한 척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 밖에도 고양이 강아지 이야기, 학교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Unlearning” 이라 표현한 것은 참 인상적이었다. 인도의 교육체계가 워낙 강압적이고 수동적이라서, 그간 세뇌된 연결고리들을 부숴나가는 과정이 이 석사과정의 목적이란다.
아무튼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 편지봉투를 보는데 눈물이 날뻔 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이런 마음을 쏟는다는게 어찌나 고맙던지, 사람에 대해 이렇게 또 배운다.
그렇게 위로의 힘으로 씩씩하게 퇴근하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준 친구도, 분에 넘치게 고마웠다. 이 세상에 정답 따위는 없다고 나에게 듬뿍 격려를 해주던 여러가지 말들이 큰 힘이 됐다. 내가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때 나를 꼭 붙잡아준 순간들을 잊지 않아야 겠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만약 이직을 해서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다면 이 친구들과도 아무렴 소원해졌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디선가, 어른이 된다는건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이 사실은 잘된 것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라는 글을 봤는데 마치 이런 상황인걸까 싶다.
금요일인 오늘은 독일어 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와 저녁을 먹기로 해서 학교 끝나고 약속장소 근처 카페에서 이른 주간회고를 쓰고있다. 어느 때 보다도 감정적으로 힘든 한 주였으니 말이다. 내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를 내 삶에서 끊어내는 사건이었달까…
그래도 그는 아무렴 나에게 영원히 소중한 사람이고, 그에 대한 원망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으니 그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진심으로 그가 그 사람만큼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 와중에 마지막까지 학교 공부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게 너무나 그 사람다워서 눈물나게 고맙고 미안하다. 내가 그에게 해준 말이라곤 “(더이상 나 때문에 독일 왔다갔다 하느라 큰 돈 쓰지 말고 그 돈으로) 네 부엌 공사좀 해.” 뿐인것도 너무나 나같았다.
제발 어디 아프지 말고, 러시아에 징병이든 망할 뭐가 됐든 말도 안되는 일 없이 몸과 마음 건강하기를. 담배좀 덜 피우고, 밥 좀 제발 잘 챙겨먹고, 운동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행복하기를.
안녕, 나의 일부가 되어주어 고마워. 공부 포기 안할게, 알람도 잘 맞춰놓고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