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회고

2024 19주차 회고 | 난 괜찮아

띠용- 2024. 5. 1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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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베를린은 눈부시게 날이 좋다. 일요일인 오늘은 아침에 필라테스 클래스를 갔다가 근처 카페에서 이번주를 돌이켜보며 블로그를 쓰고 있다. 필터 커피는 씁쓸하고 진한 맛이 난다. 내 옆엔 통화를 하는 남자와, 헤드폰을 쓰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젊은 여자, 그리고 아이와 함께 앉아 그림을 그리는 엄마가 앉아있다. 힙한 카페 하면 떠오르는 둠칫둠칫 음악이 흘러나오고 시간이 갈수록 사물의 경계가 또렷해지는 것만 같이 아름다운 햇살이 선명해진다.

나는 마저 읽던 책을 모두 읽고 새로운 책을 읽으려고 책을 두 권이나 챙겨 나왔다. 지난 4년동안 나는 전 남자친구가 된 그와 통화를 하느라 휴대폰을 붙잡고 매일 한두시간을 보냈었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비로소 느껴진다.

다음주부턴 또 다시 비가 오고 추워진다고 하던데 그동안은 이렇게 날씨가 좋아서 단지 회사 밖, 집 밖, 학교 밖에서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거의 일년만에 이런 햇살을 마주했을 때 너무 좋아서 “아!” 하고 내뱉었던 감탄사와 그 느낌은 한국을 떠나면서 처음으로 느끼게 된 것이고 그 시간도 벌써 7년이나 되었다. 아무튼 난, 이별을 극복한답시고 이번주에 계속해서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이정도면 생각보다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고, 누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와도 정말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이패드 열고 대충 찰칵. 분위기 좋은 카페



그런데 친구와 저녁을 먹고, 공원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어느 날. 날이 어둑해지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주 캄캄해진 밤이라 친구가 자기 이야기를 하는동안 조용히 울려고 했는데, 자동차 램프에 비쳐 내 눈이 그렁그렁한 걸 친구가 보곤 아무말 없이 가만히 옆에 있어주었다. 사실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난건지 기억도 안난다.

어제는 학교에 갔다가 점심시간에 대화를 나누다, 한 친구의 가족 사랑 이야기를 듣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려 펑펑 울었다. 무슨 이야기 였는지 마찬가지로 기억이 잘 안난다.

혼돈의 점심시간 이후 학교 수업을 잘 마치고, 요가 수업에 갔다. 독일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인줄도 모르고 갔다가 다른 사람들의 포즈만 보고 따라하기 바빴지만 그래도 나 자신을 돌보고 있음에 충분히 만족하며… 그런데 수업 마무리 즈음 휴식을 취하는데 또 눈물이 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또 모르겠다.

곱씹어봐도 호르몬의 공격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도 괜찮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구나 싶기도 하다. 연애는 여러번 해봤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상실의 슬픔을 느껴본 건 처음이다. 혹은 과거의 나는 나에게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일 여유를 준 적이 없다. 나에게 있어 이별이란 (물론 첫 연애는 제외하고) 불가피한 해프닝 같은 것이었다. 말그대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버린 것. 돌이켜서는 안되는 결정이고 이미 일어난 일이니 생각하지 않으려고 공부에 미친듯이 몰두하려고 했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과정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번에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내 인생의 커다란 존재가 사라졌다는 슬픔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일상 생활을 하고 하하하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슬픔이 자리하고 있고, 이유없이 눈물이 나기도 하는 것. 이유가 없다고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내가 하는 모든 생각에 그를 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장소가 아니어도 웨딩 페어 포스터, 그가 좋아하는 강아지, 아이들, 그냥 걸어가는 가족을 봐도 생각이 나서 기쁘고 슬픈 요상한 감정이 든다. 언젠가는 러시아가 징집 따위의 결정을 하지 않기를, 그와 그의 가족이 몸 건강히 지내기를 바라는 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글을 쓰다보니 생각났다. 내가 어제 요가 클래스 중에 갑자기 눈물이 났던 건, 문득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었는데 그걸 믿고 힘들어 하는게 아닐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눈물이 났던건, 친구가 힘들 때 (아님 바이오 사이클이 피크 시점일 때) 식욕이 없어서 담배와 콜라로만 살다가 볼이 깊이 패여버렸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도 지금 면도도 안하고 밥도 안먹고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을 것 같단 생각에 걱정이 되었지만 안부를 물을수도, 끼니 좀 잘 챙겨먹으라고 잔소리를 할 수도 없어 슬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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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갑자기, 베를린 외곽에서 오로라가 보일 수도 있다며 같이 오로라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고민하다가, 유난히 감정적인 하루를 보내 휴식이 필요한 것 같으니 다음을 기약하자고 답장을 보냈더니 친구가 이렇게 메세지를 보내왔다.

“Go home early, and you cry peacefully.”

울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편히 울라니. 이 말을 보는데 또 눈물이 왈칵 났다.

아주 그냥 눈물의 여왕이 따로 없다. 난 정말 잘 지내는데! 한국에 가면 과거 다이어리를 한번 들춰봐야겠다. 아니, 욕망 덩어리의 나는 내 감정은 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 있었을 것 같으니 내 마음을 돌보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좀 더 찾아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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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도 넘게 지난 지금, 나는 내 안에 갇힌 아이에게 마음을 돌볼 시간을 주고 있다. 원래 강박처럼 가던 도서관도 안가고 있고, 예전만큼 논문과 레포트를 읽어 재끼며 뭔가를 발굴해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대신 청소를 하고, 새 가구를 알아보고, 쇼핑을 하고, 운동을 더 자주가고, 책을 더 많이 읽는다. 휴대폰에 있는 그의 사진은 이미 몇 달 전에 삭제했지만 우리가 러시아에서 함께 있던 시절의 사진들이 저장된 아이패드 속 사진들은 아직 지우지 못하겠다. 다음 주가 되면, 아니면 그 다음주가 되면 지울 수 있겠지. 혹은… 뭐, 내가 원치 않으면 지우지 않아도 된다. 그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도록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었던 사람이고, 내 삶의 일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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