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0주차 회고 | 포기해
그간 나는 어떤 사랑을 했나 잠시 생각해봤다. 글자로 또박또박 적으려니 낯간지러운 질문이지만 꿋꿋하게 던진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갖고 싶은 사랑을 했던 것 같다는 것. 뭐 이렇다 정의하기엔 나는 아직도 젊지만은, 이 사람이 나의 소유였으면 좋겠다는 근본적인 욕망을 잘 감췄다고 믿고 상대에게 나를 잘보이려고 애썼다.
이번엔 아무렴 다르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다. 나이가 드는 것일 수도 있겠고, 단지 지금이 일요일 밤이라서 그럴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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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꿍이 일주일 머물고 어제자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공항으로 마중을 다녀온 뒤 홀로 돌아온 집은 왠지 익숙했다. 그가 내게 온 것이 특별한 이벤트였을 뿐, 혼자 있는 것이 원래 당연한 것인 것 같은 요상한 느낌도 들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밀린 뉴스레터도 읽고, 유튜브도 좀 보고, 영화도 보며 우울할 새도 없이 잠이 들어 숙면을 취했다.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일찍 눈이 떠진 덕분에 오늘은 아침부터 가족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간만에 사람들을 만나서 점심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도 나눴다.
어느새 사람들과 하는 나의 대화에는 내 짝꿍 이야기가 가득했다. 평소엔 일 얘기 뿐이었던 내가 그에 대한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이 새삼스럽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나는 "내 짝꿍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완전한 확신이 있으니 그가 독일에서 직업을 구하기만 한다면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한국과 러시아 인기차트 음악을 번갈아 들으며 집에 돌아와 저녁을 후다닥 요리하고, 먹고, 그릇을 정리하려는데 문득 그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같이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척척 하니 밥먹고 뒤돌아보면 싱크대가 이미 반짝반짝 빛이 났는데. 커피포트 푸르르 끓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나의 방이 그제서야 어색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열어보려 이것저것 물건을 만지는데 눈에 들어오는 메모지.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사랑해' 한단어인데 그의 글씨체를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났다. 그리곤 사진을 정리하는데 또 눈물이 났다. 이제서야 인정해본다. 다시 보는 날까지 우리는 이런 마음을 꾹 누르고 살아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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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통화를 하는데 그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시간은 참 이상하다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서 밤 늦게 잠이 들었는데도 순식간에 지나버렸다고. 이렇게 재회하고 다시 떨어지기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몰랐던 것도 아니니 이상할 것도 없는데 다 큰 어른들이어도 겪을 때마다 심난하다.
어쩔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 그래도 가진 것에 감사하기로 다짐해본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나의 마음을 꼭 다독여주는 멘토같은 짝꿍이 있고, 이럴 때 귀신같이 시차를 뛰어넘어 목소리로 위로를 전해주는 소울메이트도 있다. 날 추워진다고 뜨개실로 수면양말 떠주시는 짝꿍네 엄마도 있고, 당뇨 있으신 짝꿍네 엄마 전해달라고 당뇨에 좋은 여주차 챙겨주는 우리 엄마도 있다.
눈에 뭐가 씌였는지 내가 내 손을 봐도 짝꿍의 뚱뚱한 손가락이 보이지만 사진을 보며 좋은 추억들만 회상해보기로!
난생 처음 타이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40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드라마틱한 효과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거의 24시간에 육박하는 이동 일정에 지쳤을 짝꿍의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었을테고 우리도 내내 생경한 경험에 낄낄 웃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에 주신 생강차도 좋았다. 맛있다고 하길래 내 눈이 커지니 그는 '그렇다고 매일 마시고 싶다는 건 아니야' 덧붙였다. 또 내가 오바해서 챙겨 먹일까봐 방어ㅋㅋㅋ
한식을 사랑하는 그를 위해 거의 매일 한식 투어를 했는데, 콩나물 무침 (여긴 콩나물이 귀하니 주로 숙주나물) 먹고 맛있다고 좋아하길래 사진을 찍어뒀다가 마지막날 집에서도 만들어줬다. 거의 그릇 파먹을만큼 싹싹 긁어먹는데 대체 왜 이렇게 한국음식을 좋아하는지는 의문... 친구와 친구 남자친구까지 해서 넷이 같이 훠궈를 먹었는데, 본인이 한국음식 좋아하는 걸 이야기하다 스스로를 김치남자라고 지칭하기에 친구가 노노 그거 안좋은 뜻이라고 설명해줬다. 그랬더니 김치사랑아기로 정정 ㅋㅋㅋㅋㅋ 김치사랑아기님은 훠궈 국물 매운데도 나보다 잘 먹었다.
이건 금요일날 독일어 시험 끝나고 마중을 온 그와 함께 근처를 산책하다가 들른 차 가게에서 발견한 한국 차. 경남 하동에서 수확한 녹차인가 본데, 독일에서 프리미엄 제품으로 소개되는 게 신기해서 찍었다. 이 동네가 마음에 들었는지 여기서 투룸 집을 구하면 월세가 어느정도 되냐고 묻던 짝꿍. 응 베를린에서 제일 비싸..
짝꿍이 제일 좋아하는 스테이크하우스에서 PR 문구가 재밌어서 찍은 사진. 여기 우리 옆에 혼자 온 손님으로 두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게 왠지 좋아보였다. 그 중 한분은 음식도 잔뜩 먹고선 디저트까지 2개 주문해서 혼자 다 드시더라는...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베를린 빛 축제. 며칠전에 친구랑 같이 봤던 것 같은데 벌써 2023년이 갈무리 되어가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 사진은 찍을 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 보니 사람들이 같은 곳을 향해 올려다보고 있고 목말을 탄 아가가 보인다.
다음주면 학교가 개강을 한다. 나름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독일어 시험도 쳤고, 결과도 2주면 나올 것 같다. 아직 많은게 두렵고 걱정이 산더미이지만 그의 조언 아닌 신신당부를 되뇌이며 이번주도 마무리해본다.
"일에 더이상 욕심 부리지마. 어차피 그 회사에서 변하는건 없다는 거 알잖아. 너의 우선순위는 공부이니, 일에 대한 조바심은 이만 포기해. 일과 학업을 병행한다는 거 내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고되고 힘들거야. 그래도 공부만 절대로 포기하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