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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던져진(피투성) 존재 즉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본질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나무위키 인용) 예컨대 의자가 있다고 하자. 의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다. 즉 의자는 누군가가 앉기 위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의자의 본질은 '앉기'에 있고, 앉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만약 어떤 의자의 형태가 앉을 수 없게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의자가 아닌 것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의자의 형태를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앉을 수 있고, 그렇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의자인 것이다. 이 경우 의자의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즉 원래의 목적(본질)이 충족되는것이 존재하는 것(실존)의 형태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자와는 다르다. 인간의 본질은 결정되지 않은데다 고정된 것도 아니다. 어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는 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이 아니라, 일단 "신이 없음을 가정"하고 전개되는 것이므로 무신론적 실존주의라고 부른다.
종교에서는 신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따라 이미 인간의 목적이 생겨버린다. 그렇기에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없다고 역설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하려면, 즉 나의 본질은 "무슨 일을, 왜,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고민함으로써 결정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가장 단순하지만 어려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치열하게 고민해야한다.
왜 아침부터 일어나죠?
왜 회사에 나가죠?
왜 그토록 공부를 열심히 하죠?
왜 여행을 떠나죠?
왜 사회적 규범을 지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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