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

지겹게 롱디 중인 남자친구가 놀러왔다. 덕분에 나는 그가 머무르는 2주 동안 휴가를 내고, 일주일에 꼭 참여해야하는 미팅들과 태스크만 챙기면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다. (이것도 여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나이들수록 직장에서의 책임도 커지는 법이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아무튼 덕분에 막상 살면서도 즐기지 못했던 베를린을 만끽하고 있다. 그동안 그가 방문할 때마다 산책하면서 마주했던 예쁜 풍경들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집 주변을 신나게 산책하며 '아 이게 여기였구나' 하며 눈도장을 찍고 있다. 한 블럭만 건너가면 다른 풍경, 또 한 블럭 지나면 공원. 드문드문 벤치에는 사람들이 앉아있다. 그냥 앉아 있다. 사색을 하는건지 아님 뭔가를 하고 있는건지 모르..

일상/회고 2023. 6. 21. 21:11

간만에 사람들과 많이 교류한 한 주였다. 수요일엔 독일인 동료와 한국 식당에 갔다. "한국 사람은 스트레스 받을 때 매운음식 먹는 걸 좋아해. 그리고 그러면 진짜 스트레스가 풀려" 라고 말하며 나는 당당하게 매운맛을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보기와 달리 첫 입부터 너무너무 매운것이 아닌가.. 한 입 먹곤 매운 맛에 숨을 허덕였다. 반면 그 독일인 동료는 한번 맛을 보더니 그만큼 맵지는 않단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내가 먹지 못하고 있는) 매운 불고기를 집어 먹으며 "너 스트레스가 부족해서 그래" 라고 말한다. "그건 절대 아니야" 라고 강한 부정. 재밌는 이야기 또 하나 더. 그 한국 식당 포스터에 배우 현빈 광고가 붙어있길래, 저 배우 한국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이야기하는 배우 중 한명이라고..

일상/회고 2023. 6. 12. 04:53

엄마가 화나면 하던 말. "커서 너랑 똑닮은 애 키워봐야 알지." 스무살이 될 때까진 그렇게 속썩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뭐 때문에 다투고 그런 말을 들었는지 이제는 기억도 안난다. 하여튼 이번 주는 나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 내가 나에게 좋아하는 걸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 보냈다. 글쎄 내가 뭘 좋아하더라. 누구한테 보여주거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했던 일들이 뭐가 있었더라 생각해보는 데에도 시간이 깨나 걸려서 흠칫 놀랐다. 난 내가 좋아서 인스타그램에 올렸던건지, 아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반응을 보게돼서 좋아진건지도 헷갈렸다. 후자였던 거라면 좋아하는 줄 알았던 일도 인스타그램에 안올리면 안좋아질까 싶어 이번엔 주말에 한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안올려보기로 했다. 어쨌든..

일상/회고 2023. 6. 5. 02:52

갓 스무살이 된 나는 군대에 간 남자친구를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더랬지. 그 때 그가 없는 동안 외로움을 느낄 새 없이 나에게만 오롯이 집중하길 바라며 했던 기도가 있다. 어떤 책에서 본 문구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세요." 깨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내면의 잔잔한 요동침을 겪는 나에게 해주는 말인 것 같다. 5년 뒤 나에게 쓰는 편지, 10년 뒤 나에게 쓰는 편지, 뭐 그런 것 처럼. . . . 사랑하는 친구가 '30대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 이란 영상을 공유해주었다. 샤워하면서 귀 기울여 스킵 없이 열심히 보고, '원래 30대는 내가 바라는 만큼 어른이지 못해 힘든 시절이고, 그 와중에 내가 어떤..

일상/회고 2023. 5. 28. 23:48

이번주 목요일, 금요일은 연휴였다. 덕분에 여러권의 책과 몇 편의 영화를 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더니 지난 주 회고를 한 지 몇주는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역시 시간은 공평하지 않은 적이 없다. 행복한 순간도 지나가고, 힘든 순간도 지나간다. 우연히 '댐이 터지지 않도록' 이라는 글을 보았다. 압력이 커져서 댐이 터지게 하지 말고 흐르게 놔두라는 차분한 글. 스탕달의 '적과 흑' 줄리앙이 그랬다. 모든 걸 쟁취하고 싶었던 그는 잠재된 갈망을 꾹꾹 눌러담았다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한다.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는 모든 것을 놓아야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속 데이비드도 그랬다. 그의 연구에 대한 욕망은 헤게모니에 대한 그의 강렬한 믿음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는 자신의..

일상/회고 2023. 5. 23. 07:49

전날 발송된 뉴스레터를 읽으며 출근하는 어느날 아침. 광고메일이나 별로 읽고싶지 않은 메일들 (링크드인의 매칭 포지션 추천이나 사람인의 수많은 광고메일들…)은 읽음 처리하는게 습관이 되어버린 나. 그 날도 어김없이 메일함에 들어가선 어딘가 낯선 메일을 발견한다. “[MBA]… Admission 2023” 덜컥 합격해버린 것이다. 그럴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일찍 나왔네 하는 오만한 생각, 일단 ‘합격’이니 기쁜 마음, 어떡하지 하는 불안한 마음 등등.. 어김없이 여러가지 감정이 우르르 동시에 몰려왔다. 곰곰이 돌이켜봤을 때 그 중에서도 스스로에게 새삼스러웠던 감정은 “이제 또다른 옵션이 생겨 기쁘다”는 것이었다. 될대로 되라고 여러가지 시도를 했던 나는 결국 그 절박함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

일상/회고 2023. 5. 14. 23:01

오래된 무성영화를 오케스트라 실황 연주와 함께 (영어 자막도 같이!) 제공하는 영화관에 가보았다. 관람한 영화는 The cabinet of Dr. Caligari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공포" 영화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사실 이 영화는 우리가 많이 접해온 상업영화들이 분류한 공포영화류라기 보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으스스한 내용의 추리영화에 가깝다. 중간까진 어느정도 예상 가능한 플롯들이 이어져 별 긴장 않고 보았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화들짝, 반전 플롯에 깜짝 놀라게 되었던 영화. 1920년에 개봉한 영화이니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표현하는 영화라는 해석이 압도적인데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하나 희망차고 밝은 것이 없다. 죽음, 허무, 의구심..

일상/회고 2023. 5. 13. 14:52

5월이 밝은지 3일차가 되고서야 적어보는 4월의 회고. 긴 겨울을 보낸 탓이라고 말하기에는 답답하고 황당한 사건의 연속이었던 기이한 한 달이었다. 계속해서 물 밑 발장구를 치기에는 동력을 잃어버린, 참 고되었던 한 달. 지금껏 회사를 다니면서 굳이 사람을 찾았던 적이 없는데, 최근들어 '힘들다'는 말을 잘 털어놓고 다닌다. 예전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얼 지향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부터 무턱대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비자 때문에)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상황이 너무 막막하다, 불합리한 상황을 계속 겪으니 무기력해진다, 등등... 연휴를 앞둔 지난 금요일, 하필 시내에 사는 바람에(!) 집 밖은 이미..

일상/회고 2023. 5. 3. 17:51